제목 제32회 한터 백일장 작문 심사평 & 수상작
작성자 센터지기 등록일 2024.05.28
제32회 한터 백일장 작문 심사평 & 수상작


◼︎ 심사평

이번 백일장 작문 제시어는 ‘MBTI’입니다. 출제할 때 제시어에 관해서 준비생들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응모작이 쏟아졌습니다.

MBTI라는 소재를 가지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접근법이 다수의 글에서 등장했습니다. 개인이 가진 개별적 특성을 무시한 채로 모든 사람들은 범주화하고 단순 분류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여러 문제와 부작용을 거론하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최근에 기업의 면접 과정에서 면접관들이 입사희망자들의 MBTI를 물어본다는 기사도 나온 터라 이에 기반해서 아이디어를 낸 글들도 많았습니다. MBTI가 유행하면서 사람들을 쉽게 분류하고 제멋대로 판단하는 세태를 평면적으로 보여주는 데서 그치는 글들은 차별성이 부족했습니다.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아이디어를 낸 글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최우수작은 타인에게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MBTI가 쓰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로 글을 전개하고 있는데, 통찰의 차별성이 돋보이는 글이었습니다. 우수작 1은 MBTI가 특정한 방향으로 수렴되는 주인공을 묘사하면서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MBTI는 숙명적으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글인데,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하는 요소가 강합니다. 우수작 2는 미래의 시점에 조금 더 진화한 형태의 MBTI가 생겨날 수 있다는 걸 상상한 글인데 아이디어가 신선했습니다. 우수작 3은 MBTI라는 잣대로 한 사람을 쉽게 판단한 걸 뒤늦게 깨닫는 글인데, 읽는 이로 하여금 미소짓게 하고, 마음이 따뜻해지게 하는 힘이 강합니다.

작문 백일장에 응모해준 모든 준비생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는 9월 제33회 백일장에서 또 만나면 좋겠습니다.


◼︎ 최우수작 (신지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것이 한국 사회 전통이라면 나눠 먹기 전에 상대의 혈액형부터 물어보는 것은 필수였다. '같은 혈액형이 아니면 같은 물병에 입을 댈 수 없다' 초등학교 시절 대원칙이었다. 다른 혈액형과 침이 섞이면 몸에 나쁘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타인의 침은 더럽고,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콩 한 쪽도 나눠 먹어야 하는 사회에서 쩨쩨하게 굴 순 없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혈액형 원칙을 들어 물병 공유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정 없는 우리의 선택을 ‘정당화’한 것이다. MBTI는 혈액형의 연장선에 있다. 성격유형은 후천적인 반면 혈액형은 타고난 것이기에 전혀 달라 보이지만, 사람을 집단으로 분류하고 집단별 특성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이 둘은 공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지점이 있다. MBTI 역시 타인에게 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인다는 점이다.

정당화는 정당하지 않은 것을 마치 정당한 것처럼 꾸며내는 행위다. 사회적 관계 맺음에서 정당성이 결여된 행동은 상대에게 불쾌감을 유발하거나 직접적 피해를 주는 정도로 볼 수 있다. MBTI는 상대에게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는 사람인지부터 규정한다. MBTI는 자신을 특정 유형으로 한정 짓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검사이다. 가령 '나는 감정보다 이성에 따르는 사람인지'를 묻는 문항이 있다. 감정과 이성은 추상적 개념이기에 개인마다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지하철역에서 쓰러진 사람이 눈앞에 있을 때 시험에 늦더라도 도와주는 결정을 감정적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반면, 감정과 이성을 떠나 당연한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외에도 구체적 맥락이 제시되지 않은 채 추상적 표현을 담은 문항이 대부분이다.

이렇듯 MBTI 검사는 개인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지만 정확한 결과값을 제시하여 내가 정말 그렇다는 강한 믿음을 준다. 그 믿음 아래 행위의 정당화가 시작된다. 사회적 관계는 본능에 따른 행동에서만 형성 또는 유지되지 않는다. 나의 생각이 상대와 완전히 배치되거나 상대를 불쾌하게 만든다는 판단이 서면 이를 내비치지 않는 노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MBTI는 이러한 노력을 굳이 들일 필요가 없도록 만든다. 감성보다 이성에 가까운 알파벳 'T'의 경우 애써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기보다 “나는 감정에 연연하지 않는 유형이라서 그러한 너에게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한 마디면 된다. 인터넷에 ‘ENTJ’, ‘ESTP’ 등 ‘독설가’ 유형으로 꼽히는 몇 개의 MBTI가 있다. 누군가에게 독처럼 나쁜 말을 하는 것은 엄연히 무례한 행동이지만 그마저 하나의 유형으로 존중받는 것이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편리할지 몰라도 결국 개인을 옭아맨다.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때 ‘고정된 나’가 뚜렷하면 이전보다 더 나은 결정을 감히 시도하기 어렵다. 만약 내가 생각한 나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한다면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 있으며, 정해진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느낄 수 있다. 불교에서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이 있다. 마땅히 ‘나’라고 여길 고정된 본체는 없으며 오직 ‘변하는 나’만 있다는 의미다. 삶을 살아가면서 무수한 배움과 성장, 때로는 좌절도 겪으며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다. MBTI 대유행 시대에 일시적, 단편적인 내가 아닌 변화무쌍한 입체적 나를 인정하는 자세가 더욱 필요하다.


◼︎ 우수작1 (박소호)

저는 스물네 살 김선영입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하루가 될 예정이에요. 한 달 전부터 약속했던 친구 선아와 만나기로 한 날이거든요.

“시리야, 내 와우로그 분석해 줘.”
“네 선영님, 어제 하루 동안의 와우로그를 분석했습니다. 데이터에 따라 선영님의 헤드셋 주파수와 음량을 조정할게요.”
저는 자타공인 얼리어답터랍니다. 매일 아침 시리에게 부탁해 저의 청각 데이터인 와우 로그를 분석해요. 저는 청력이 아주 예민해서 회사에서도 헤드셋을 자주 껴요. 얼마 전에는 옆 팀 박 과장님이 지나가다 헤드셋을 끼고 있는 저를 보면서 이러시더라고요. “이야 선영 씨 역시 MZ세대라 그런가? 요즘은 회사에서도 헤드셋을 다 끼고 있네. 세상 참 좋아졌어. 선영 씨가 그 I인지 뭔지 그런 성향이야?”

저는 어색한 웃음만 지었어요. 저희 팀 팀장님이 황급히 달려오시더니 박 과장님을 어디로 데려가면서 이것저것 설명하시더군요. 박 과장님은 못내 못마땅하시는 눈치였지만, 어쩌겠어요. 박 과장님 말씀처럼 저는 다른 사람이 말 걸까 봐 무서워서 헤드셋을 끼고 있는 슈퍼 내향형, I 인걸요.

“선영님, 오후 6시 5분에 예약해 두신 택시가 로비 앞에 도착해 있습니다. 늦지 않게 택시에 탑승해 주세요.”
드디어 기다리던 퇴근시간이 왔어요. 목적지는 지난주에 예약해 둔 코인노래방이에요. 무인운영시대에 무슨 코인노래방을 예약하고 가냐고요? 그만큼 오늘 하루가 저에게는 특별했거든요. 처음 가보는 코인노래방이라 어렵게 예약했답니다. 정말이에요, 제가 전화해 본 코인노래방만 10군데만 넘는걸요. 이곳 사장님만 아들이 생각나신다며 예약을 받아주셨어요. 그 말에 순간 눈물이 나와, 어느새 저희의 전화 통화에서는 훌쩍이는 소리만 났답니다. 정말, 사장님도 저도 못 말리는 F인가 봐요.

"선아야, 우리도 인생네컷 찍어볼래?" 카페에 가는 길, 덥석 이 말이 나왔어요. 사실 즉흥적으로 뭔가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오늘 선아와의 만남이 너무 좋아서였을까요. 저도 한 번 무계획적으로 살아보고 싶었어요. 선아와 같이 예쁜 머리띠를 고르고, 부스에 입장해 사진을 찍었죠. 들뜬 마음으로 프린트를 기다리는데 글쎄, 제가 다 잘려서 머리에서 코까지 밖에 안 나왔더라고요. 선아는 이것도 귀엽다며 저를 위로해 줬지만, 글쎄요. P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요.

"선영아, 너 MBTI 검사해 봤어?" 저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주려는지 카페에 들어온 선아가 저에게 이것저것 권유해 보더라고요. 제 MBTI는 INFJ라더군요. 사실 이미 예상한 결과였어요. 선아는 옆에서 부러 더 호들갑을 떨며 호응을 해줬어요. 맞아, 선영이만큼 계획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내가! 그리고 선영이 평소에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 자주 하잖아. 선의의 옹호자, 그 문구를 어쩐지 저는 한참이나 쳐다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알까요, 장애를 가지고 사는 저에게 MBTI는 숙명적으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단 걸. 미리 예약을 하고 가지 않으면 휠체어로는 갈 수 있는 곳이 없어 꼭 계획해야 하는 J가 되어야 하고, 점점 떨어지는 청력 때문에 사람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에 I가 되어가고, 내가 장애를 가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매분 매초를 상상하는 N이 된다는 것을요.

장애가 없는 저의 MBTI는 어떤 결과였을까요? 시리도 이것만큼은 답해주지 못할 것 같습니다.


◼︎ 우수작2 (서다은)

[엄마, 그림검사 곧 시작한대. 학원 다녔으니까 이번에는 꼭 합격할 수 있겠지…?]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회사 면접의 첫 번째 관문, 그림검사가 곧 시작된다고 한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이 그저 지켜보아야 하는 엄마의 마음은 때로는 미안하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유행이란 것은 너무도 빠르게 변한다. 30년 전에 우리 엄마를 괴롭히던 혈액형 검사는 15년 전엔 MBTI가 되어 나를 못살게 굴었고 지금은 그림검사로 그 모습을 바꾸어 내 딸의 취업을 번번이 막아 세우고 있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가면을 바꾸어가며 집단에 어울리지 않는 우리를 걸러낸다.

1년 전, 그림검사 AI가 등장했다. 그것은 비전문적이라는 논란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MBTI에서 단점은 제거하고 장점은 배가시킨 일명 ‘진화된 MBTI’라 불렸다. 개인의 특징과 경험, 심리적 갈등을 명확히 드러내는 객관적인 검사로서 빠르게 명성을 얻은 그림검사는 처음엔 대중들 사이에서, 다음엔 신입사원들의 인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인사담당자들 사이에서 인지도를 높였다. 이제 그림검사 AI를 활용한 채용은 대중적인 채용프로세스의 한 과정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시장에 뛰어든 딸은 그림검사 단계에서 매번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먼 옛날 그림검사를 개발했다는 학자들을 저주하던 그 아이는 결국 대학에 다니는 내내 모아두었던 적금을 깨서 ‘그림검사 개조 학원’에 등록했다. 다음날, 나는 술에 진탕 취한 딸의 가방에서 학원에서 받은 것으로 보이는 그림검사 결과지를 발견했다.

김유진 님의 그림검사 결과
벽: 두께가 얇고 경사졌음  약한 자아
문: 비교적 작음  수동적, 내성적, 우유부단
창문: 없음  적대적·부정적 경향, 타인에 대한 관심 부족
굴뚝: 진한 연기가 많이 나옴  가정 내의 갈등, 정서 혼란
스트로크: 흔들리고 덧칠되는 선·지우개로 지운 흔적  자신감 없음, 불안감
결과: 김유진 님은 자아가 약하고 수동적이며 타인에 관한 관심이 부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집단생활 시, 다른 사람들과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으며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하지 못해 동료에게 과도하게 의존할 수 있습니다. 그림검사 AI는 김유진 님을 회사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로 판단합니다.

학원에서 받아온 또 한 번의 ‘탈락’ 결과지, 그것을 다시 아이의 가방에 집어넣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판자촌 비탈진 골목길 끝에 있는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딸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함께 살아온 우리만의 작은 집. 벽은 곧 무너질 것처럼 얇고, 문도 작고, 창문도 아이의 방에 있는 하나가 전부고, 불을 땔 때마다 진한 연기가 새어 나오는 우리만의 집. 이 집에서 살아왔기에 아이는 기업이 원하는 자아를 가지지 못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 걸까. 문득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나뭇가지를 주워 땅바닥에 집 한 채를 그렸다. 곧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는 벽에 꽁꽁 닫힌 작은 문, 검고 탁한 연기가 뭉게뭉게 새어 나오는 굴뚝. 완성된 그림을 멍하니 쳐다보다 발로 쓱쓱 문대고는 다시금 그림을 그려냈다. 튼튼한 벽, 활짝 열린 창문, 적당히 연기가 흘러나오는 따뜻해 보이는 집. 차라리 영어 4글자로 끝나던 그때가 좋았다. 아이가 자라온 공간을 부정하지는 않아도 되었을 테니.


◼︎ 우수작3 (최현슬)

열정적인 중재자 INFP 오빠와 엄격한 관리자 ESTJ인 나. 우리 엄마 아들과 나의 MBTI는 정반대다. 오빠와 나는 태어난 시간이 딱 3분 차이나는데,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학창시절 내내 나는 전교 1등을, 오빠는 꼴등을 놓치지 않았다. 내 꿈은 회사원이었고 오빠의 꿈은 작곡가였다. 나는 사실 오빠가 미웠다. 내가 중학교 전교 회장이 돼 신이 났던 날, 엄마는 오빠 가방에서 담배를 발견하곤 엉엉 우셨다. 또 공개 수업 날에는 오빠네 담임선생님을 만나느라 내 반엔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 엄마만 안 온 것 같은 외로운 교실에서 나는 손을 더 번쩍 들고 꿋꿋이 발표를 했다. 나는 늘 나의 일부를 별난 오빠로부터 침범당했다.

그런데 오빠는 이제 내 자취방까지 침범했다. 우리 집은 거실에 방 하나가 딸린 '1.5룸'이다. 오빠는 작곡한 노래를 돌리러 서울에 왔다가, 서울에 여자 친구가 생겼다며 내 집 거실에 눌러앉았다. 취업준비 때문이 아니라, 여자 친구 때문이라니. 한심했다. 하지만 엄마가 방세 절반을 내주셨기 때문에 오빠를 내쫓을 권리가 없었다. 우린 규칙을 정해 타협했다. “내 방 문 절대 열지 마. 옆집에 각자 사는 것처럼 하는 거야.” 그렇게 나는 거실을 잃어버렸다.

식기 건조대 위, 고춧가루 묻은 접시들. 꿉꿉한 냄새가 나는 빨래 더미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마주하는 오빠 놈의 작품이다. 계속해서 선을 그어도, 오빠는 또 선을 넘어 내 구역에 흔적을 남겼다. 이게 몇 번째 반복인지. “제발 좀 신경 쓰이게 하지 마!” 잔뜩 화나 소리치며 방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밴드 데이프가 엊저녁 발매한 신곡을 크게 틀었다. 아직 처음 들었을 때의 전율이 남아있어 금세 기분이 나아졌다.

내게 집은 특별한 의미였다. 혐오스러운 인간을 단 한 명도 마주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3년 간 지점 업무가 필수라는 은행 사규 덕에 나는 입사 초 병을 얻었다. 출근길 5호선 열차를 탈 때면, 앞뒤로 빽빽한 성난 사람들에 숨이 가빠져왔다. 철로를 지나는 소음이 커지는 구간에선 손가락을 들이밀며 폭언을 내뿜던 화난 목소리가 떠올라 온몸이 떨렸다. 다행히 그런 나를 구해준 건 데이프의 음악이었다. 헤드폰을 쓰고 눈을 감으면, 잠시나마 세상에 혼자 있는 느낌이 들어 출근의 비통함을 잊을 수 있었다.

벌컥. 오빠가 갑자기 방문을 열었다. 왜 규칙을 깨냐는 신경질을 낼 새도 없이 오빠가 말을 쏘아댔다. “너도 얘네 좋아해?!! 첫 부분에 기타 리프 대박이지 않냐?” 신난 오빠가 일렉 기타로 곡 오프닝을 쳤다. 혼자 헤드폰을 끼고 연주에 심취해있는 꼴사나운 모습만 봤는데, 앰프 속 오빠의 기타 소리를 처음 들었다. “나도 그거 좀 알려주라.” 기타에 관심도 없는 나였는데, 순간 말이 튀어나갔다.

이때부터 오빠의 교습이 시작됐다. 저녁마다 오빠는 내 눈높이에 맞는 코드를 하나씩 알려줬다. 선생님이 된 것 마냥 들떠서 칭찬도 하고 혼도 내면서 나를 가르쳤다. 그러다 내가 “이것도 칠 수 있어?”하며 신청곡을 들이밀면 곡을 하나씩 연주해 줬다. 나는 보답으로 회사 근처의 유명 맛집 음식을 하나씩 포장해 집으로 갔다. 어느 정도 코드를 외운 출근길의 나는, 기타 치는 손동작을 하며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리는 신난 방구석 락커가 돼 있었다.

“이거 한번 들어봐.” 어느 날 오빠가 자신이 만든 노래 한 곡을 들려줬다. “와…” 소름 돋도록 취향에 딱 맞았다. 집에서 구박만 받던 한심한 오빠가 달라보였다. 오빠의 곡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나는 출근길 플레이리스트에 오빠의 노래를 차곡차곡 담아 아껴 들었다.

데이프의 크리스마스 콘서트에 가던 길, 오빠에게 잘 풀리지도 않는 음악을 왜 계속 하냐고 물었다. 오빠는 잠시 대답을 주저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처음 들려준 노래 기억나?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가 너무 울길래 만든 노래였는데, 그거 듣곤 엄마가 웃더라고.”

나는 마땅한 답변을 찾지 못한 채 오빠가 보내줬던 곡을 다시 틀었다. ‘당신은 웃는 게 더 예뻐요. 그 싱그러운 미소를 볼 때면 난 눈을 뗄 수 없어.’ 특유의 밝은 에너지로 무장된 3/4박자 멜로디와 유치한 가사 속에는 엄마를 사랑하는 오빠의 마음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공연장 뒤에서 데이프 멤버가 한 명씩 걸어 나오며 손을 흔들자, 환호가 크게 터져 나왔다. “첫 번째 곡으로 저희가 올해 초 발매했던 신곡 들려드릴게요.” 리더의 곡 소개와 함께 ‘Live your life’의 짜릿한 오프닝이 시작됐다. 나는 고개와 발을 세차게 까딱거리며, 옆자리에 서서 감탄을 연발하는 오빠를 슬쩍 바라봤다. 그 순간 오빠의 눈빛은 더 반짝거렸다. ESTJ인 나의 엄격한 잣대로, INFP 오빠의 열정적인 인생을 함부로 평가했던 시간이 부끄러워졌다.